어느 심사역의 비결

max
2018-08-09

액셀러레이터로 일한다는 것은 창업가와 세치 혀로 주고받는 진검승부와 같은 일이다. 오가는 것은 말과 말, 표정과 제스처지만, 그 짧은 말 한마디, 그 찰나에는 삶의 무게가 실려있다. 한 번의 실수로 치명상을 입는 일은 드물지만, 몇 번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자신과 동료들의 삶, 때로는 가족의 삶 전체를 던져가며 일하는 창업가 앞에서 세치 혀를 돌리다 다리가 후들거린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대기업, 공직을 마다하고 뛰쳐나와 퇴직금을 몽땅 밑천삼은 퇴직자 창업가, 결혼자금을 털어 창업한 예비신부 창업가, 6개월 째 급여를 가져가지 못하는 세 가족의 가장 창업가, 수천만원의 자본금을 모두 날렸으나 아직 서비스를 출시하지 못한 창업가, 엄마를 부르다 발 밑에서 웅크려잠든 아이를 외면하며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야 하는 두 아이의 엄마 창업가가 휘두르는 총과 칼은 매섭다. 특히, 사회를 바꿔보겠다며 사회문제 해결에 자신을 내던진 창업가들은 더 매섭다.

 

그런데, 최근에 살펴보니 우리 회사 한 심사역이 이 일을 매우 잘 해내고 있다. 그가 액셀러레이팅을 맡았던 소셜벤처의 후속투자 유치율이 무려 50퍼센트에 달하고, 그 중 시리즈 A단계는 67퍼센트에 이르고 있었다. 참고로 그는 sopoong 입사 전 투자 경험이 없는 창업가 출신이다. (액셀러레이터로서의 성과를 투자유치율로만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명확한 지표도 없다. 후속투자를 받았다는 말은 팀이 성공적으로 사업을 수행해내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비결을 물어보았다.

 


경청한다.

대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끝까지, 또 자주 듣는다.


대표를 답답해하지 않는다.

대표자가 얼마나 바쁜지,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기에 대표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이해하려한다.


대표가 전문가고, 결정도 대표가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문제와 사업 분야의 전문가는 대표님입니다. 오히려 제가 비전문가고 저 역시 정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고민을 상세하게 말씀해주시면 최선을 다해 조언해드리겠습니다.”


투자사의 입장만 강조하지 않는다.

대표와 이야기할 때, 투자사나 액셀러레이터로 처신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대표 입장, 투자사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여 팀에 가장 좋은 방향을 조율하려 한다. 때론 투자사와 대표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한다.


심사역의 역할과 대표의 역할을 구분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심사역으로서 대표와 팀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 해줄 수 없는 일을 구분하지 않는다. 액셀러레이터로서 심사역의 역할은 어떻게든 대표와 팀의 성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역할에 상을 짓기보다는 최대한 대표가 필요한 것, 고민하고 있는 것, 팀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집중한다.


무조건적인 독촉을 하지 않는다.

회사의 속도가 느려도 독촉을 하기 이전에 대표와 회사의 상황을 보아가며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려 노력한다.


상대가 감동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동의가 되지 않는 사업 방향이거나 회사의 사활이 달린 상황, 명백히 잘못된 결정을 한 경우 대표와 끝장 토론을 한다. 손쉬운 타협이 아니라 상대가 감동하여 설득될 때까지 다른 근거를 제시하며 주장한다. 끝까지 믿음을 주려고 노력한다. 


그 사업을 경험한다.

가급적 현장에 꼭 가본다. 음식을 배송해주는 회사면 가서 조리를 같이 해보고, 교육회사면 교육현장에 가본다.


원래 해결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역량있는 팀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있지만, 그 것이 어떤 상황때문에 발현이 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원래 팀이 그 해결책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이 심사역의 비결을 생각하다가 떠오른 일화들도 있다.

 

한 번은 회사 대표님이 ‘담당 심사역을 바꿔주세요. 저랑 안 맞는 것 같아요.’라고 연락을 해왔다. 그가 맡은 팀이었다. 양쪽의 이야기를 각각 들어보았다. “이 대표님을 이렇게 두면 안된다. 커뮤니케이션이나 일하는 방식의 문제를 부딪혀서라도 바꿔야 한다.”는 것이 심사역의 의견이었다. 반대로 대표님은 “담당 심사역님이 커뮤니케이션도 잘 안되고, 우리 사업을 잘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 같아요. 매주 진행하는 회의시간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제가 필요하다고 요청할 때 도움을 주세요.” 라는 입장이었다.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그는 “저의 진심이 잘 전해지지 않은 것 같고, 대표님이 오해하고 계신 것 같다”며 솔직하고 깊이있는 대화를 해보겠다고 했다. 몇 일 뒤, 대표는 자신이 잘 못 생각한 것 같다고 사과의 뜻을 전해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물어보았다. 대표님께 솔직하게 회사와 대표에 대한 생각과 앞으로 어떤 일들을 함께 해야 하는지,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를 말씀드렸다고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며 오해를 풀었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의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엄청나게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 마디면 될 말을 세 마디, 다섯 마디로 하기도 한다. 대화 중에 불쑥 맥락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와 일해본 사람들, 그와 대화를 나눠본 사람들은 그의 ‘진정성’이 최고라고 엄지를 척 든다. 무엇보다도 그의 진정성이 좋은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말이다.

 

또 한번은 그가 맡은 팀의 투자계약이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늘 진정성을 갖고 팀과 대표를 대하는 그에겐 흔치 않은 일이라 생각하고 대화에 참여했다. 몇몇 조항들을 놓고 몇 일 동안 의견을 주고 받고 있었는데 그날은 마치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대화가 몇시간 동안 이어졌고, 나는 우리 회사의 입장을 명확히 설명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다음날, 원안대로 투자계약을 진행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표자의 요구도 일리가 있었기에 중간 지점에서 합의가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그대로 진행하기로 되었다는 말이 의아했지만, 당시 너무 바쁜 나머지 그냥 마무리하고 넘어갔다.

 

얼마 뒤, 대표자를 만나 어떻게 된 건지를 물었다. 대표는 눈을 굴리며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 분이 이 이야기를 이렇게나 오래, 열정적으로 하시길래 그냥 믿기로 했다”고.

 

정리하자면, 여느 관계에서와 같이 액셀러레이팅에서도 진심은 통한다. 창업자와 팀에게 이래라 저래라, 성공에 대해 틀에 박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창업자와 팀의 성공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함께 뛰고, 울고 웃는 것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자신이 맡은 팀으로부터 몇시에 연락이 오든지, 어떤 상황에서 연락을 받든지, 아무리 촉박한 부탁을 받든지 서운함을 드러내거나 귀찮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자신의 담당이 아닌 팀으로부터의 연락도 소홀히 대하는 법이 없다. 어찌보면 뻔하고 또 쉬운 일 같지만, 투자를 해보면 안다. 이 일들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힘들지 않냐는 나의 말에 ‘오죽했으면 대표가 그 시간에 연락했을까 싶어요’라는 그를 보며, 혀를 내두르게 된다.

 

대표님들 앞에서 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신경쓰일 때는 없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이 현답이었다.
“두렵죠. 잘못된 말이나 조언을 할까봐요. 대표님들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사업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두렵다고 인생 걸고 사업하는 분들을 혼자 둘 수는 없잖아요? 그 고민할 시간에 도움 될 일이 하나라도 없나 찾아보고 공부하는게 나은 거 같아요”

 

이제 그는 곧 아빠가 된다. 미리 사돈을 맺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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